한국 방위산업과 공업고등학교의 상관관계


한국 방위산업과 공업고등학교의 상관관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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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71년, 2차 번개사업 때 얘기임

60mm 박격포 국산화 과정에서 문제가 하나 대두됨. 처음 제작한 박격포를 미국 측에 보내 검사를 맡겼는데 시제품들이 싸그리 빠꾸를 먹음.

이유는 공차가 안 맞아서였음. 문제는 당시 한국에 공차가 뭔지 이해하는 기술자가 거의 없었는데다 숫자도 부족했음.

당시 한국 전체 기능공을 싸그리 합쳐봤자 5000명밖에 안 됐음. 이공계 교육기관을 풀가동해도 기능공은 64만명이 부족하다는 수치가 나옴

방위산업 건설(+중화학공업 건설)을 위해서 숙련기계공들을 육성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는 오원철 경제제2수석비서관 주도로 전국에 91개 공고를 세움

특히 대포 주퇴복좌기는 1만분의 1인치의 정밀도로 가공해야 했는데, 이런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특히 기계공고에서는 쇠를 1천분의 1mm이하로 깎을 수 있는 기술자들을 양성함

그리고 1968년 중학교 입시시험이 폐지되며 중학생들이 대폭 증가했기 때문에 늘어난 공고 입결 수요를 맞출 수 있었음.

이렇게 한국은 우수한 100만 기능공들을 단시간에 얻을 수 있었고, 이를 바탕으로 방위산업 드라이브를 갈길 수 있었다는 이야기임

출처는 위 책임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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